기도 가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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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도 가쓰히코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야구 해설가이다. 선수 시절 한신 타이거스에서 포수로 활약했으며, 1985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여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코치와 2군 감독을 역임했고, 2군 감독으로 두 차례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2017년부터는 여자 야구 일본 대표팀 헤드코치를 맡아 여자 야구 발전에 기여했다. 2024년부터는 한신 타이거스 Women의 감독을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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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가쓰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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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수명 | 기도 가쓰히코 |
원어명 | 木戸 克彦 |
로마자 표기 | Katsuhiko Kido |
출생지 | 오사카부 사카이시 니시구 |
생년월일 | 1961년 2월 1일 |
신장 | 178cm |
체중 | 91kg |
수비 위치 | 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선수 경력 | |
소속 구단 | 한신 타이거스(1983 ~ 1996) |
코치 경력 | |
코치 | 한신 타이거스(1997 ~ 2005, 2008 ~ 2011) |
기타 정보 | |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
드래프트 순위 | 1순위 |
첫 출장 | 1983년 4월 24일 |
마지막 경기 | 1996년 10월 9일 |
2. 선수 시절
(내용 없음)
2. 1. 프로 입단 전
사카이 리틀 리그 출신이다.[1] 초등학교 6학년 때 참가한 사카이 시 연합 운동회의 소프트볼 던지기 종목에서 당시 최고 기록을 세웠다. 사카이 시립 하마데라 중학교 시절 포수가 되었으며[1], 동기인 아노 고지, 와다 도루와 함께 '하마데라의 3선수'로 불렸다.1976년 PL가쿠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쓰루오카 야스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1학년 가을부터 주전 포수가 되었고, 1년 선배인 요네무라 아키라와 배터리를 이루었으나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3학년 때인 1978년에는 동기 니시다 신지와 배터리를 이루어 고시엔에 봄, 여름 연속으로 출전했다.[1] 봄 선발 대회에서는 준준결승에서 미시마 고등학교의 이시이 쓰요시 투수에게 완봉패를 당했다. 하지만 여름 선수권 대회에서는 극적인 승부를 연출하며 우승을 차지했다.[1] 준결승에서는 주쿄 고등학교를 상대로 9회말에 4점 차를 뒤집고 연장 12회 접전 끝에 승리했으며, 결승전에서는 모리 고지가 에이스로 있던 고치 상업 고등학교를 상대로 9회말 역전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기적적인 승리로 인해 당시 PL가쿠엔은 '역전의 PL'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79년, 니시다와 함께 호세이 대학에 진학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활약하며 재학 중 세 차례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1년 후배인 와다 마모루 (닛산 자동차) 및 동기 다나카 도미오 등과 배터리를 이루며, 리그 통산 76경기에 출전하여 274타수 84안타, 타율 .307, 5홈런, 33타점을 기록했다. 2학년이었던 1980년 가을 리그부터 5시즌 연속으로 리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으며, 4학년 때인 1982년에는 주장을 맡았다. 또한 3학년(1981년)과 4학년(1982년)에는 2년 연속으로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선발되었다. 대학 동기로는 니시다 신지, 다나카 도미오, 진다 에이이치 등이 있었고, 1년 후배로는 PL가쿠엔 후배이기도 한 고바야카와 다케히코, 초시 토시오 등이 있었다.
2. 2.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82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1] 대학 선배인 다부치 고이치가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한 후 4년간 비어있던 등번호 22번을 받았다. 하지만 입단 첫 해인 1983년에는 부담감으로 인한 요통 악화로 전력에서 이탈했고,[2] 와카야마현 나치카쓰우라정의 온천 병원에서 3개월간 재활 치료를 받았다.[3][4] 이 시기에는 가사마 유지가 주전 포수 자리를 굳혀 키도는 주로 2군에 머물렀고, 1군에서는 8경기 출전에 그쳤다.1984년에는 야마카와 다케시가 주전 포수가 되면서 26경기에 출전했다. 입단 후 2년간 2군과 불펜을 오갔지만, 시바타 다케시 1군 배터리 코치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5][6] 키도는 시바타 코치로부터 "100% 준비를 위해 가장 먼저 구장에 나올 것",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과 최악을 동시에 생각할 것"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5] 시즌 막판에는 4경기에서 선발 마스크를 썼다.
1985년, 요시다 요시오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개막전부터 야마카와를 대신해 주전 포수로 발탁되었다.[7] 그는 3년차 선수답지 않은 노련한 리드와 뛰어난 승부 감각,[8] 안정적인 2루 송구 능력으로 베테랑부터 젊은 선수까지 투수진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2] 타격에서는 뉴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8번 타자로서 하위 타선에 배치되었지만, 때로는 과감한 모습을 보였다.[2] 버스, 가케후, 오카다의 '''백스크린 3연발'''이 팀 분위기를 끌어올린 시즌이었는데, 키도 역시 6월 15일 다이요 웨일스와의 고시엔 구장 경기에서 2회 가네자와 쓰구오, 5회 호리이 미키오, 7회 아오키 히데오를 상대로 모두 좌측 담장을 넘기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2] 시즌 막판에는 부진했지만, 6월까지 9개의 홈런을 치는 등[2] 규정 타석에는 미달했음에도 개인 최다인 1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9]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여, 13홈런 중 7개, 32타점 중 15타점을 요미우리전에서 기록했다.[2] 키도는 자신만의 리드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순히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헛스윙이나 파울을 유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투수가 원하는 공을 파악하여 던지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배터리 관계라고 믿었다.[2] 1985년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랜디 버스의 포구를 도우며 주자 아키야마 고지를 홈에서 잡아내는 결정적인 블로킹을 선보이기도 했다. 팀의 21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구단 역사상 첫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8]
1986년부터는 시력 저하로 안경을 착용하고 경기에 나섰으며,[23] 시마다 무네히코와 주전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팀의 부진과 맞물려 타격 성적도 하락했다.[2] 1988년에는 개인 최다인 121경기에 출전하여 유일하게 규정 타석(리그 24위, 타율 .254)을 채우며 주전 자리를 지켰지만,[2] 12개의 패스트볼을 기록하기도 했다. 1989년 요미우리전에서는 하라 다쓰노리와의 홈 충돌 과정에서 왼쪽 발꿈치 박리 골절을 당하고 안경 렌즈가 깨져 얼굴에 박히는 등 전치 4주의 큰 부상을 입었다.[2]
연습 중 실책으로 동료들에게 질책을 받고 입스를 겪기도 했으나, 쓰지 야스히코 배터리 코치의 도움으로 토스된 공을 네트에 던지는 연습을 반복하며 극복했다.[10] 1990년까지 주전 자리를 지켰지만, 고질적인 오른쪽 어깨 부상과 성적 부진이 겹치면서 1990년대 들어서는 야마다 가쓰히코, 세키카와 고이치 등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점차 내주게 되었다.[2]
1992년 7월 30일 요미우리전에서 이시게 히로시로부터 끝내기 볼넷을 얻어내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타격은 부진했다. 같은 해 9월 1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장 시간 경기)에서는 연장 15회말 2사 1, 2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설 예정이었던 토마스 오말리가 "대타를 내보내도 남은 야수가 키도밖에 없다"[11]는 이유로 고의사구를 얻기도 했다(결국 키도는 대타로 나오지 못했고 다음 타자 야마와키 미쓰하루가 삼진으로 물러나며 무승부로 끝났다). 이 해 최종 타율은 .101에 그쳤다.
유후네 도시로와는 특히 좋은 호흡을 보였는데,[2] 1992년 6월 1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고시엔 구장 경기에서는 2군 강등 위기에 놓였던 선발 투수 유후네에게 "아직 노히트 노런을 받아본 적 없으니 절대 맞지 마라"고 격려하며 노히트 노런 달성을 이끌었다.[2] 젊은 투수들에게는 경기 중 벤치 뒤에서 기합을 넣어 투구 내용을 향상시키는 역할도 했다.[8]
1996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같은 해 10월 9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고시엔 구장 경기에서 은퇴 경기가 열렸고, 8번 타자 겸 포수로 선발 출전하여 그 해를 마지막으로 팀을 떠나는 나카니시 기요오키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현역 시절 나카니시, 히라타 가쓰오, 기도 세 명은 팬들 사이에서 'NHK 트리오'라고 불렸다.
3. 은퇴 후
현역 은퇴 이듬해인 1997년부터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군 배터리 코치(1997년 ~ 1998년, 2001년 ~ 2002년), 2군 배터리 코치(1999년), 1군 불펜 코치(2000년)를 역임했다. 코치 1기 시절에는 투수와 포수진에게 형처럼 다가가며 열정적으로 지도했고[12], 구원 투수의 상태를 냉정하게 분석하여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계투 작전을 보조했다[13]. 특히 1999년부터 2001년 노무라 감독 시절에는 위기 상황이나 투수 교체 시 직접 마운드에 오르는 역할도 맡았다. 2001년 시즌 종료 후에는 노무라 감독의 추천으로 잠시 수석 코치(추계 캠프 한정)로 임명되었으나, 노무라 감독이 사임하면서 다시 1군 배터리 코치로 복귀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을 맡아, 재임 기간 중 웨스턴 리그에서 두 차례(2003년, 2005년) 우승을 이끌었다. 시마노 이쿠오가 1군 종합 코치에서 2군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팀을 떠났다.
퇴단 후 2006년부터 2007년까지는 아사히 방송, 선 텔레비전 야구 해설위원 및 닛칸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했다. 이 시기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 '호랑이 밴주의. 키도 가쓰히코니까 역시 타이거스→호랑이 거리 질주'를 매주 토요일 담당하기도 했다.
2008년, 한신 타이거스의 1군 작전 코치 겸 배터리 코치로 복귀했다. 당시 방송사 및 신문사와의 계약이 3월까지 남아있었기 때문에, 코치 업무와 병행하며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스프링 캠프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캠프에서는 가노 게이스케가 홍백전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타자와 대화하자 격노하여 호통치는 등[24] 선수들에게 엄격한 지도를 했지만, 가노에 대해서는 꾸짖으면서도 뒤에서 챙겨주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25]
2009년에는 한신 타이거스 1군 수석 코치(헤드코치)로 승격되었으나, 2011년 시즌 종료 후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이 사임하면서 함께 코치직에서 물러났다[14].
2012년부터는 한신 타이거스 구단 프런트로 자리를 옮겨 편성 본부 부속(차장 대우)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5일에는 차장 대우 제너럴 매니저 보좌가 되었고, 나카무라 가쓰히로 제너럴 매니저의 갑작스러운 별세 후 2015년 10월 1일부로 구단 본부 부속 차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7년 10월에는 구단 본부 부장(프로 스카우트 담당)을 맡는 동시에 여자 야구 일본 대표팀 헤드코치로 취임하며[15] 여자 야구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여자 야구 발전에 힘써 전국 고등학교 여자 경식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전의 고시엔 구장 개최 실현에 기여했으며[16], 국제 대회 코치 동행, 고등학교 여자 야구 강화 경기(대 이치로 선수가 이끄는 고베 지벤) 헤드코치 역할 수행 등 여자 야구 진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17].
2023년부터는 스카우트 업무와 함께 한신 타이거스 Women(위민) 팀의 총괄을 겸임했으며[18][19], 2024년부터는 한신 타이거스 Women의 감독으로 정식 취임했다[20][21][22]. 등번호는 '''70'''번이며, 현재 팀 총괄 및 프로 스카우트 업무도 계속 겸임하고 있다.
4. 에피소드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유일하게 거스를 수 없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신 타이거스 전에서 기요하라가 위험구 등으로 상대 투수에게 달려들 때도, 키도가 나서면 진정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2]。키도는 기요하라가 PL학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한 해 전에 프로에 입단했으며, 당시 야구부 전성기이자 선배(OB) 숭배가 강했던 학교 분위기 속에서 키도는 기요하라에게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PL학원 시절, 후배인 니시다 히로시(西田博)의 무신경한 언동에 참다못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하지만 니시다 및 한 기수 아래인 고바야카와 다케히코와는 호세이 대학 졸업 때까지 사적으로도 깊은 교류를 이어갔다고 한다.
1985년 8월 12일 발생한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사고 당일, 키도는 원정 이동을 위해 해당 사고기(JA8119)가 123편으로 운항하기 전의 비행편, 즉 후쿠오카 공항 발 하네다 공항 행 366편에 탑승했었다. 당시 한신 팀은 8월 11일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주니치 드래곤스와 경기를 치렀고, 8월 13일부터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어, 사고 당일은 후쿠오카에서 도쿄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한편, 키도의 부인은 원래 사고기인 123편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출발 직전에 예약을 취소하여 화를 면했다. 이 사고로 당시 한신 타이거스 구단 사장이었던 나카노 하지메가 사망했다.
기혼이며 부인과의 사이에 딸이 한 명 있다. 딸이 태어났을 때,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이냐는 언론의 질문에 자신의 성씨인 '키도(木戸)'를 이용해 "ルナ|루나일본어로 지을까 생각 중이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이는 '키도루나(気取るな, 젠체하지 마라)'라는 일본어 표현을 이용한 말장난이었다.
5. 상세 정보
(내용 없음)
5. 1. 출신 학교
- PL가쿠엔 고등학교
- 호세이 대학
5. 2. 선수 경력
- 한신 타이거스 (1983년 ~ 1996년)
5. 3. 지도자 경력
현역 은퇴 이듬해인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에서 1군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노무라 가쓰야 감독 시절에는 위기 상황이나 투수 교체 시 마운드로 직접 올라가는 역할도 담당했다. 2001년 시즌 종료 후 노무라 감독의 추천으로 잠시 수석 코치로 발탁되었으나, 노무라 감독이 사임하면서 다시 배터리 코치로 변경되어 2002년까지 활동했다.2003년부터는 2군 감독으로 부임하여 그해 2군 정규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2년 뒤인 2005년에도 다시 한번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시마노 이쿠오가 종합 코치 겸 2군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팀을 떠났다.
2006년부터 2년간 아사히 방송 야구 해설위원과 닛칸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한 뒤, 2008년 한신 타이거스에 1군 작전 코치 겸 배터리 코치로 복귀했다. 당시 방송 및 신문사와의 계약 기간이 3월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스프링 캠프 상황을 보고하기도 했다.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가노 게이스케가 홍백전에서 실수를 하자 크게 질책하는 등[24] 선수들에게 엄격한 지도를 펼쳤다.[25]
2009년부터는 한신의 1군 수석 코치로 승격되었고, 2011년 시즌 종료 후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이 사임하면서 함께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 한신 타이거스 1군 배터리 코치 (1997년 ~ 2002년)
-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2003년 ~ 2005년)
- 한신 타이거스 1군 작전 코치 겸 배터리 코치 (2008년)
- 한신 타이거스 1군 수석 코치 (2009년 ~ 2011년)
5. 4. 해설자·평론가 경력
5. 5. 수상 경력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1회 (1985년, 포수 부문)
5. 6. 개인 기록
-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유일하게 거스를 수 없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신과의 경기에서 기요하라가 위험구 등으로 투수에게 달려들려 할 때, 기도 가쓰히코가 나서면 진정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고 한다.[2] 기도는 기요하라가 PL학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해에 프로에 입단했으며, 야구부 전성기였던 당시 PL학원 특유의 선배 존중 문화 속에서 기도는 기요하라에게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PL학원 시절, 동료 니시다 아키라의 무신경한 언동에 참다못해 주먹을 휘둘렀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니시다 및 한 기수 아래인 고바야카와 다케히코와는 호세이 대학 졸업 때까지 사적으로도 깊은 교류를 이어갔다고 한다.
- 1985년 8월 12일, 당시 한신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메가 희생된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당일, 사고 비행기(JA8119)가 123편으로 운항하기 직전 후쿠오카 공항에서 하네다 공항으로 향하는 366편에 원정 이동을 위해 탑승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한신 팀은 8월 11일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경기를 마치고, 8월 13일부터 고라쿠엔 구장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어 후쿠오카에서 도쿄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또한 기도의 아내는 당초 123편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직전에 예약을 취소하여 화를 면했다.
- 아내와의 사이에 딸이 한 명 있으며, 딸의 출생 발표 당시 작명에 대한 질문에 성이 '기도(木戸)'인 점을 이용해 "루나(ルナ|일본어)로 할까 생각 중이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어 '키도루나(気取るな|일본어, 잘난 체하지 마)'와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말장난이다.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실 | 희타 | 희비 | 4구 | 고4 | 사구 | 삼진 | 병살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3 | 한신 타이거스 | 8 | 9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0 | 0 | 3 | 0 | .000 | .333 | .000 | .333 |
1984 | 26 | 28 | 2 | 5 | 2 | 0 | 0 | 7 | 2 | 0 | 0 | 3 | 0 | 1 | 0 | 1 | 5 | 2 | .217 | .280 | .304 | .584 | |
1985 | 103 | 358 | 34 | 71 | 5 | 1 | 13 | 117 | 32 | 0 | 0 | 18 | 2 | 41 | 9 | 2 | 41 | 8 | .241 | .335 | .397 | .732 | |
1986 | 95 | 237 | 16 | 46 | 12 | 0 | 5 | 73 | 23 | 0 | 0 | 10 | 2 | 22 | 2 | 0 | 32 | 10 | .227 | .300 | .360 | .659 | |
1987 | 101 | 275 | 26 | 56 | 9 | 0 | 6 | 83 | 18 | 1 | 1 | 11 | 1 | 26 | 8 | 2 | 27 | 10 | .238 | .318 | .353 | .671 | |
1988 | 121 | 408 | 34 | 89 | 14 | 1 | 6 | 123 | 38 | 0 | 1 | 19 | 2 | 35 | 6 | 1 | 62 | 8 | .254 | .321 | .350 | .672 | |
1989 | 93 | 317 | 22 | 69 | 14 | 1 | 6 | 103 | 32 | 3 | 1 | 13 | 2 | 21 | 1 | 1 | 49 | 7 | .246 | .299 | .368 | .667 | |
1990 | 102 | 264 | 19 | 54 | 7 | 0 | 5 | 76 | 30 | 0 | 1 | 7 | 2 | 21 | 3 | 4 | 49 | 7 | .235 | .307 | .330 | .638 | |
1991 | 80 | 185 | 14 | 37 | 7 | 1 | 5 | 61 | 24 | 0 | 2 | 4 | 0 | 18 | 3 | 0 | 36 | 6 | .227 | .304 | .374 | .678 | |
1992 | 63 | 99 | 8 | 9 | 1 | 0 | 2 | 16 | 10 | 1 | 0 | 3 | 0 | 7 | 0 | 0 | 21 | 3 | .101 | .167 | .180 | .346 | |
1993 | 49 | 125 | 8 | 25 | 8 | 0 | 1 | 36 | 6 | 1 | 0 | 3 | 0 | 10 | 0 | 0 | 25 | 5 | .223 | .287 | .321 | .608 | |
1994 | 34 | 73 | 5 | 19 | 5 | 0 | 1 | 27 | 1 | 0 | 0 | 1 | 0 | 5 | 0 | 0 | 8 | 0 | .284 | .333 | .403 | .736 | |
1995 | 50 | 108 | 4 | 16 | 2 | 0 | 0 | 18 | 6 | 1 | 0 | 2 | 1 | 14 | 1 | 0 | 22 | 4 | .176 | .283 | .198 | .481 | |
1996 | 40 | 52 | 7 | 9 | 3 | 1 | 1 | 17 | 4 | 1 | 1 | 1 | 0 | 4 | 1 | 0 | 13 | 2 | .191 | .255 | .362 | .617 | |
통산: 14년 | 965 | 2538 | 199 | 505 | 89 | 5 | 51 | 757 | 226 | 8 | 7 | 95 | 12 | 228 | 34 | 11 | 393 | 72 | .230 | .305 | .345 | .650 |
'''연도별 수비 성적'''
연도 | 소속팀 | 포수 | ||||
---|---|---|---|---|---|---|
경기 | 기획수 | 허도루 | 도루자 | 저지율 | ||
1983 | 한신 타이거스 | 8 | 13 | 9 | 4 | .308 |
1984 | 25 | 15 | 10 | 5 | .333 | |
1985 | 102 | 114 | 74 | 40 | .351 | |
1986 | 93 | 71 | 50 | 21 | .296 | |
1987 | 101 | 68 | 47 | 21 | .309 | |
1988 | 121 | 109 | 78 | 31 | .284 | |
1989 | 93 | 95 | 65 | 30 | .316 | |
1990 | 97 | 93 | 65 | 28 | .301 | |
1991 | 76 | 63 | 45 | 18 | .286 | |
1992 | 61 | 31 | 24 | 7 | .226 | |
1993 | 49 | 34 | 27 | 7 | .206 | |
1994 | 30 | 25 | 18 | 7 | .280 | |
1995 | 47 | 33 | 22 | 11 | .333 | |
1996 | 40 | 28 | 19 | 9 | .321 | |
통산 | 943 | 792 | 553 | 239 | .302 |
- '''굵은 글씨'''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연도.
5. 6. 1. 첫 기록
- 첫 출장 : 1983년 4월 24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차전(나고야 구장), 6회말에 포수로서 출장
- 첫 안타·첫 타점 : 1984년 9월 15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에 오카와 아키라로부터 적시 2루타
- 첫 선발 출장 : 1984년 9월 25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번·포수로 선발 출장
- 첫 홈런 : 1985년 4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4회말에 가토 하지메부터 2점 홈런
5. 6. 2. 기타 기록
- 올스타전 출장 : 2회(1986년, 1988년)
5. 7. 등번호
- 22 (1983년 ~ 1996년)
- 70 (1997년 ~ 2005년, 2010년 ~ 2011년)
- 91 (2008년 ~ 2009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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